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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두 개의 투표용지 논란, 아직도 현재진행형
    Feature/Politics 2017. 5. 12. 2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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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대 대통령 선거는 뜨거운 열기 속에서 치뤄졌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에 의해 치뤄진 조기 대선이기 때문에 과거의 대선보다 선거 기간이 짧았지만, 국민들의 정치에 큰 관심을 쏟고 있는 상황이었기에 밀도는 여느 대선보다 훨씬 높았다. 비록 최종 투표율이 80%를 넘기지는 못했지만, 진보와 보수의 대격돌이라 칭해지며 '투표 할 사람은 다 했다'는 평가를 받던 지난 18대 대선보다 높은 투표율을 기록했다.

    여기에는 대통령 선거에서 처음 시행된 사전투표의 힘도 컸다. 자그마치 26%에 달하는 유권자들이 사전투표를 통해 자신의 권리를 행사했다. 이는 정치에 대한 뜨거운 관심을 반영하는 지표였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논란이 발생했다. 바로 2개의 투표용지 논란, '붙어있는 투표용지'가 있다는 소문이었다.

    위 이미지는 어느 네티즌이 만든 예시이다. 정상 투표용지는 CASE #2처럼 각 후보자의 이름과 정당명 사이에 간격이 있는 형태인데, CASE #1과 같이 간격이 없는 형태의 투표용지가 존재했다는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는 SNS상에서 시작되어 주로 범진보 성향의 인터넷 커뮤니티를 위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고, 자신도 간격없이 붙어 있는 투표용지에 기표를 했다는 경험담이 속출했다. 이야기는 점점 살이 붙더니 결국 '붙어 있는 투표용지에 기표한 것은 무효가 된다.'는 이야기까지 나오기 시작했다.

    개인적으로는 세 가지 이유에서 붙어 있는 투표용지가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첫 번째는 모두들 기억에 의존할 뿐 물증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표소 내 사진 촬영이 금지되었다고는 하지만, 단 하나의 물증도 나오지 않았다는 점은 의심스러웠다. 사람의 기억은 의혹을 제기하기 위한 합리적인 근거가 되기에는 결함이 많다. 두 번째는 의혹을 제기한 이들이 모두 일반 유권자라는 점이다. 투표소에 있던 참관인이나 근무자들에게서 관련된 증언은 거의 나오질 않았다. 이들은 투표용지만 쳐다보고 있기 때문에 만약 투표용지에 이상이 있었다면 가장 먼저 알아차릴 사람들이다.

    마지막으로 아직 기표가 되지 않은 투표용지를 조작해서 얻을 실익이 없다는 것이다. 만약 소문대로 선관위가 붙어있는 투표용지를 통해 무효표를 만들어 내겠다는 의도가 있었다고 가정해보자. 그렇다면 이 투표용지를 받아서 기표할 유권자가 어느 후보에게 투표할지 알 수 없는 상태에서 무작위로 무효표를 만들어 내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알기 어렵다. 이번 대선에서 세대별 투표 성향이 극명하게 갈렸다고는 하지만, 인터넷에 올라온 경험담은 세대, 성별을 불문하고 불특정한 성향의 유권자들이 붙어 있는 투표용지를 받았다고 주장했다. 이는 무효표를 만들 투표용지가 특정 세대나 성향을 가리지 않고 랜덤하게 배부되었다는 뜻인데, 선관위 직원이나 공무원들이 얼굴만 보고 어느 후보에게 투표할지 꿰뚫어볼 수 있는 관심법을 가진 사람들이 아니고서야 이런 행위가 어떤 목적을 달성하게 할 수 있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결국 선관위는 2개의 투표용지는 없으며, 혹여 붙어 있는 투표용지에 기표된 표가 나오더라도 무효표로 처리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리고 대망의 개표날, 수많은 사람들이 목격했다던 붙어있는 투표용지는 발견되지 않았다. 개인적인 추측이지만, 정당명과 후보자명 사이에 간격이 생기면서 기표하는 칸이 작아졌고, 그 칸 밖으로 벗어나지 않게 조심히 투표하려던 기억이 '다른 사람에게 기표가 될까봐 조심스럽게 투표했다.'는 식으로 왜곡되면서 일어난 일종의 해프닝이 아닐까 생각한다. 붙어 있는 투표용지를 받았다는 증언 대부분이 '칸을 벗어날까봐 조마조마하며 찍었다.'는 식이었다는 점이 이런 추측에 무게를 싣게 한다.

    물론 이러한 의혹 제기는 선관위에 대한 신뢰가 떨어진 사회적 분위기를 반영한다고 할 수 있다. 순전히 유권자들만의 탓으로 돌리기는 어렵다. 또 딴지일보 김어준 총수가 18대 대통령 선거 개표 과정에 의혹을 제기한 다큐멘터리 영화 <더 플랜>이 근래에 공개되어 한참 영향력을 발휘하던 시점이기에 더욱 불이 붙은 감도 있다. 때문에 김어준 총수와 정치적 성향을 비슷하게 취하는 범진보 성향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붙어 있는 투표용지 이야기가 빠르게 확산되기도 했다. 문제는 자신이 옳다고 믿고 한 점 의심없이 꺼내든 의혹이 일으킨 나비효과이다.

    이러한 의혹을 주로 제기하고 퍼트렸던 범진보 성향의 인터넷 커뮤니티들이 지지하던 후보가 19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상황은 완전히 반대가 되었다. 붙어 있는 투표용지 의혹을 제기했던 인터넷 커뮤니티들은 기쁨의 축배를 들기에 바빴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붙어 있는 투표용지 의혹에 대해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았다. 간간이 이야기가 삐져나오긴 했으나 관심을 받지 못하고 묻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문재인 대통령에 대한 반감을 강하게 가지고 있는 극우 성향의 인터넷 커뮤니티인 일간베스트(일베)와 박사모 등지에서 19대 대통령 선거가 끝난 후 '붙어 있는 투표용지가 있었고, 거기에 기표한 것은 무효표가 된다'는 의혹이 힘을 가지고 번지기 시작했다. 심지어 김어준 총수의 영화 <더 플랜>을 근거로 삼아 전자 개표기 해킹을 통한 개표 조작이 있었다는 이야기도 횡행하기 시작했다. 반대편의 무기가 선거 결과에 따라 정반대로 넘어가서 여전히 힘을 발휘하는 셈이다.

    당연히 이러한 의혹들은 정당성을 얻을 수 없고 합리적인 논의의 테이블에 올라오지 못할 것이다. 다만 이러한 비합리적 의혹 제기를 무기로 삼아 정권을 공격하거나 타인을 선동하는 행위는 꾸준히 이어질 것이다. 아마도 잘 조직된 형태의 가짜 뉴스가 되어 인터넷과 거리를 떠돌게 될 지도 모른다. 

    한 쪽에서 꾸준히 흐르는 불신을 바탕으로 제기된 근거가 빈약한 의혹이 반대편에서 힘을 가지고 다시 재생산되고 있다. 물론 이러한 의혹제기는 지난 이명박-박근혜 정권에서의 공공기관들이 정치적 중립성을 지키지 않은 무수한 사례들을 보아온 경험이 밑바탕이 되었을 것이다. 권력 기관과 공공 기관에 대한 끝없는 감시와 견제는 민주 사회의 시민이 당연히 가질 수 있는 권리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이전에, 과연 나의 의혹 제기가 합리적인가에 대한 논리적인 의문이 선행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비논리적 음모론은 '합리적 의혹'의 탈을 쓰고 부메랑이 되어 되돌아 올 것이다.

    그냥 말도 안되는 소리로 치부해버리면 된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지난 9년간 말도 안 되는 소리로 치부되었던 목소리들은 이명박-박근혜 정권을 반대하던 이들의 삶을 지탱해주는 근간이 되기도 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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