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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방송 순위제의 종말Feature/Entertainment 2017. 4. 29. 14:57반응형
이변이라는 말이 맞는 표현일지 잘 모르겠다. 대중적으로 크게 알려져 있지 않았던 걸그룹 라붐이 KBS '뮤직뱅크'에서 무려 아이유를 꺾고 2017년 4월 마지막주 1위를 거머쥐었다. 라붐의 데뷔 후 첫 1위를 축하하고 싶지만 의구심부터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물론 내가 모르는 어딘가에서 라붐의 인기가 차근차근 올라가고 있었을 수도 있지만, 그게 공중파 음악 방송 1위라는 가시적인 성과를 낼 만큼 커져 있을 거라는 확신은 들지 않기 때문이다. 우선 나의 의심이 합리적인가에 대한 고찰이 필요하다.
1위 후보에 오른 아이유의 '사랑이 잘'은 정규 앨범의 선공개곡이기 때문에 방송 활동도, 별도의 음반 판매도 없었다. 다만 음원 차트에서 장기간 1위를 고수하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시청자 선호도 점수라는 불분명한 지표를 제외하고 본다면, 아이유의 점수에는 특별히 이상한 부분은 없다. 다만 라붐의 경우는 특이하다. 방송 점수와 음반 점수가 아이유에 비해 압도적으로 높은 편이다. 이 두 항목에서 라붐은 아이유를 따라 잡았다.
특별히 음모론을 제기할 생각은 없다. 음원 성적만으로 1위 후보에 오른 아이유에게 불리하게 하려고 존재하지 않던 방송 점수나 음반 점수를 급작스럽게 신설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 수혜자는 라붐 뿐만이 아니다. 라붐이 1위를 하기 바로 전주의 틴탑 역시 비슷한 흐름으로 아이유를 꺾고 1위를 거머쥐었다. 틴탑과 라붐의 차이점이라면, 틴탑은 한풀 꺾이긴 했지만 나름의 인기를 구가했고 팬덤의 규모가 예상가능한 반면, 라붐은 그러한 조짐이 전혀 없이 갑작스레 높은 음반 점수를 얻었다는 점이다. 때문에 라붐의 음반 사재기 의혹이 불거지기도 하지만 여기서 짚고 싶은 지점은 아니다. 과연 순위를 산출하는 기준이 합리적인가에 대해 묻고 싶을 뿐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왜 아직 음반 점수가 음악 방송에서 순위 산출에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한 의구심이다. 과거 음반 판매량이 대중적 인기의 지표가 되던 시절은 분명히 있었다. 원하는 음악을 원하는 순간에 듣기 위해서는 CD가 됐든 테입이 됐든 물리적 매체를 구입해서 그 안에 담겨 있는 음악을 감상해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mp3 플레이어의 보급 이후 음반을 사는 행위는 음악 감상을 하기 위한 효율적인 행위가 아니게 되었다.
특히 2010년대 초부터 빠른 속도로 보급된 스마트폰과 무선 인터넷은 mp3 파일을 다운받는 행위마저 비효율적으로 만들었다. 언제든 스트리밍이라는 손쉬운 방법으로 원하는 노래를 원하는 시간대에 들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때문에 이제 음반 구입은 그 가수의 팬으로서 관련 물품을 소장하는 개념이지, 더 이상 음악 감상을 위한 수단이 되지 못한다.
스트리밍 시대가 도래하면서 생긴 문제는 바로 수익에 있다. 무제한 스트리밍의 가격과 이를 통해 발생한 수익 배분 문제는 꾸준히 뜨거운 감자이다. 스트리밍 가격이 상승하고, 멜론이나 엠넷같은 음원 판매 업체와 음원을 발매하는 음원 제작사 간의 수익 배분 비율 역시 꾸준히 조정되고 있지만, 여전히 한 번 스트리밍을 할 때 제작사가 가져가는 수익은 동전으로조차 존재하지 않는 10원 이하이다.
때문에 제작사는 음반 판매에 다시 한 번 희망을 걸게 된다. 일반 대중들은 등을 돌리기 시작하고 팬덤만이 음반을 구매하게 된 시장에서 음반 판매를 늘리기 위한 여러 방법들을 시도한다. 가장 많이 구사되는 전략은 한 가지 앨범을 여러 버전으로 발매해 팬덤의 소유욕을 자극하거나, 기존에 발매한 음반에서 2~3곡씩 신곡을 추가해 리패키지라는 형식으로 음반을 판매하는 것이다. 한 명이 전곡을 스트리밍으로 돌려 봐야 50원이 벌릴까 말까한 상황에서 한 장이라도 물리적 형태의 음반을 더 팔 수 있다면 나쁘지 않은 전략이다.
그리고 이러한 팬덤의 구매 의지를 자극하는 데에는 음악 방송 순위 제도가 매우 좋은 기능을 한다. 음악 방송들은 저마다 비율은 다르지만 음반 판매 점수를 순위 산출 기준에 포함시킨다. 팬이라면 누구나 자신이 좋아하는 가수가 1위를 하길 바라기 때문에 최종 순위 산출 과정에서 높은 점수를 얻게 하기 위해 필요 이상으로 음반을 더 구매하고자 하는 의지가 생기기 마련이다. 결국 더 많은 수의 팬덤이나 더 많은 자본을 가진 팬덤을 소유한 가수들이 음악 방송에서 높은 순위를 차지할 가능성이 생기는 셈이다. 제작사는 음반 판매수를 늘릴 수 있어서 좋고, 방송사는 '우리가 음반 점수를 도입했기 때문에 음반을 더 팔 수 있는 것 아니냐'는 암묵적인 신호를 보내며 연예인이나 제작사에 대한 자신들의 영향력을 키울 수 있다.
하지만 이미 대중은 음악 방송의 순위제를 신뢰하지 않는다. 방송사와 제작사가 순위 프로그램에서 음반 점수와 방송 점수를 포함시키며 서로에게 이득을 챙겨주는 동안 대중들은 주변에 팬이 아닌 이상 아무도 음반을 사지 않는다는 사실과 모두가 스트리밍으로 음악을 감상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때문에 대중들은 음악방송보다는 음원 차트를 더 신뢰한다. 스트리밍 차트에도 일부의 조직적인 움직임이 있지만, 그 움직임이 다수의 대중의 선택을 압도하지는 못하고 있다. 음원 차트를 통해 드러나는 대중의 선택과 음악 방송 순위를 통해 드러나는 결과가 어긋나는 경우가 가끔 있어오긴 했지만, 라붐이 아이유를 꺾으며 이 간극이 선명하게 가시화된 것이다.
나름의 방식으로 순위제의 권위를 지키기 위해 여러 항목을 넣었다 빼고 비율을 조정하는 등의 노력이 무색하게도, 라붐이 이 허술하고 불합리한 체계에 힘입어 아이유를 꺾고 1위를 거머쥔 순간 모든 것은 물거품이 되었다. 더 이상 음악 방송들이 매기는 순위는 아무런 의미가 없어졌다. 이렇게 음악 방송 순위제는 모든 신뢰를 잃고 실질적으로 종말을 맞이하게 되었다.
관련글 : 2017/03/20 - [Feature/Entertainment] - 누구를 위하여 스트리밍을 돌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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