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EEPROOTS [Keepin' the roots]

발매일 : 2004년 3월 18일

많은 이들에게 생소한 이름일 수 있지만, 힙합에 관심있는 사람들에게 킵루츠(Keeproots)는 한국 힙합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이름이다. 피타입의 '돈키호테', 가리온의 '영순위', 불한당 크루의 '불한당가' 등 여러 명곡들의 프로듀서로 이름을 알렸으며 아직도 꾸준히 활동 중이다. 뿐만 아니라 은지원의 오래된 음악적 파트너로서 "와 베이비 와~"라는 후렴으로 유명한 곡 'Adios'를 쓴 것을 계기로, 은지원의 솔로 커리어 뿐 아니라 은지원이 주축이 되어 결성한 혼성 그룹 클로버의 곡들도 대부분 그의 손에서 탄생했다. 덕분에 KBS '1박 2일'이나 MBC '스친소'같은 예능 프로그램에서 은지원의 친구로 얼굴을 내밀기도 했다.

그런 그의 존재를 힙합씬에 확실히 각인시킨 앨범이 바로 현재까지 그의 유일한 솔로 앨범 [Keepin' the roots]이다. 당시 다 크루(Da Crew)가 설립한 언더그라운드 레이블 '가라사대'를 통해 발매된 이 앨범은, 발매된 지 10년이 훌쩍 지났음에도 여전히 세련미를 뽐내는 앨범이다. 현재는 다양한 스펙트럼의 음악을 선보이고 있지만, 이 앨범은 그의 시그니쳐라고 할 수 있는 재지(Jazzy)한 힙합 트랙이 가득 담겨 있다. 음원 사이트에서는 몇 곡을 제외하고는 감상이 불가능하지만, 전곡의 인스트루멘탈이 수록된 CD까지 함께 담긴 2CD 구성에서 그가 자신의 프로듀싱에 얼마나 자신감을 가지고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앨범에서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바로 킵루츠의 랩이다. 지금은 단순히 프로듀서로서 널리 알려져 있지만, 그는 랩과 프로듀싱을 병행하는 뮤지션으로서 자신을 포지셔닝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의 랩은 크게 귀를 잡아 끌만한 매력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본인도 그 사실을 인지했는지 대다수의 곡은 다른 뮤지션들이 참여하고 있다. 피타입, 리오 케이코아, MC 메타, 현무, 에픽하이, 얀키, 태완 a.k.a. C-luv, 라디 등 참여한 뮤지션들은 저마다 이름값을 해내는 랩을 선보인다. 킵루츠의 뛰어난 프로듀싱은 본인의 랩보다는 게스트 뮤지션들과의 조화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놀라운 점은 14트랙이 수록되고 인스트루멘탈까지 포함해 2CD로 구성된 이 앨범이 EP 앨범이라는 점이다. 그는 자신의 정규 앨범인 [Black Coffee]를 발매하겠다고 이야기했지만, 어느덧 그 계획은 10년이 훌쩍 지났고 사실상 무산된 것으로 생각된다. [Black Coffee]의 수록될 예정이었던 정기고, 태완, 채영, 진보가 참여한 R&B 단체곡 'Alright'이나 피타입과 재즈 보컬리스트 말로가 함께한 '흐르는 피아노'같은 곡들이 무료로 공개된 적이 있는데, 두 곡의 뛰어난 완성도를 생각하면 [Black Coffee]가 발매되지 않은 점은 많이 아쉽다.

현재는 MC 성천이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프로듀서 Fascinating과 함께 자주 협업하며 불한당 크루의 멤버로서, 은지원의 음악적 파트너로서 뿐 아니라 빅스(VIXX)같은 아이돌 그룹들과도 작업하는 전문 프로듀서로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그의 음악을 접할 곳은 다양하지만, 그의 음악이 가장 잘 농축되어 있는 앨범은 여전히 [Keepin' the roots]라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는 비가 오는 날 꺼내 듣고 싶어지는 음반 중 하나이다. 작년에 공개된 Ground Zero 인터뷰에서 자신의 솔로 앨범을 발매할 계획이 있다고 밝혔으니, [Keepin' the roots]처럼 좋은 음반이 다시 한 번 나오길 기대하고 있다.